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괄의 난 (문단 편집) === 금부도사를 죽이다 === 인조는 주모자로 거론된 이들 중에 [[이괄]]과 [[정충신]]에 대해서는 체포하지 말라고 했다. 대신 금부도사 고덕상과 선전관 김지수 등을 보내 이괄의 아들은 압송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아들 이전은 이괄과 같이 있었고, 이괄은 자기 군영을 찾아온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살해하였다. 연려실기술에는 금부도사가 아들을 잡으러 오자, 이괄은 일부러 문을 늦게 열어주며 시간을 끌고는, 아비인 자신이 무사할 수 없다며 차라리 반역하겠다는 심리를 부하들에게 털어놓았고, 이에 심복들이 반역을 부추기자 결심을 굳히고 다른 장수들을 불러 위협한 뒤, 도사를 안으로 들인 다음 베어 죽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비록 야사의 기록이지만 실록에도 '이괄이 도사 등을 죽이고 장수들을 위협하여 난을 일으켰다'라고 유사한 내용이 적혀 있는 것을 보면 비교적 신뢰성이 높다. 하지만 정말로 충동적으로 난을 일으킨 것인지는 이괄이 이후 생포되지 않고 죽는 바람에 국문을 못해 밝혀진 바 없다. 부하들이 앞장서서 난을 부추겼다는 것이나 순식간에 서울을 점령한 일사불란한 행동을 볼 때, 어렴풋이라도 반란의 계획이 있었을 수도 있다.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죽인 이괄은 1월 24일에 항왜 100여 명과 휘하 병사 1만여 명을 모두 통솔하여 영변에서 남하하기 시작한다. 조정에서는 깜작 놀라 바로 대책을 논의했으나, 초기에는 영의정 [[이원익]]이 관서 지방에서 존경받고 있으니(이원익은 임진왜란 초기 평안도 도순찰사로서 평안도의 병력을 편성해 일본군을 저지한 바 있다.) 인심을 장악해 반란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제안하자, 다른 신하들도 전부 동의했을 정도로 반란을 비교적 쉽게 진압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인조도 이를 받아들여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아(이원익으로서는 임진왜란 이후 2번째 도체찰사 부임이다)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인조 2년 1월 24일.] 한편 인조반정과 유몽인의 옥사를 거치면서 북인 출신 권신들과 광해군의 측근 세력들을 잔혹하게 처벌한 서인 정권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이번에도 북인 출신 권신이었던 [[기자헌]]을 비롯한 북인들과 광해군의 측근세력들은 또다시 이괄의 난을 조사한다는 명목 하에 붙잡혔다. 서인 정권은 이번 기회에 북인 세력 자체를 몰살하기 위해, 북인의 씨를 말릴 계책을 세웠다. 여기서 기자헌과 북인 정치범 37명에 대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논쟁이 이어졌다. 기자헌과 북인 정치범 37명에 대해서는 이귀는 국문을 통해 처형이나 유배로 가릴 것이다는 주장을 했고, 김류는 반란군과 내통할 수 있다는 이유 아래 바로 처형을 할 것임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괄의 반군에게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가고, 정부군 측에서 불리하게 돌아가자 인조와 서인 정권은 김류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기자헌을 사사하고 북인 정치범 37명을 참수했다. 비록 김류 혼자 우겨서 진행한 것은 아니고 삼정승과 인조가 동의하여 일어난 일이었지만, 인조반정 때에는 북인들을 1차로 가혹하게 숙청하더니 이번에도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2차로 북인들을 잔혹하게 숙청했다. 이로 인해 북인들은 왕과 서인, 남인들이 북인들에 대해 몰살했다는 사실에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다. 특히 기자헌은 비록 광해군 시절에는 권신이었으나 [[이이첨]]과 [[허균]]이 [[인목왕후]]를 폐위시키려 폐모론을 주도할 때 반대했던 대신이었는데도 모함을 받아 본인 뿐만이 아니라 일가가 몰살 당하는 억울한 변을 당했다. 결국 나중에 인조와 서인 정권도 자신들의 잘못 을 이정하고 이귀의 이원익의 상소를 받아들여 기자헌을 포함한 몇몇 북인 정치범들을 복권 시켰고 북인 정치범들의 숙청을 주도한 김류 본인 조차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숙청 피해자들의 복권에 찬성할 정도였다. 북인들의 여론은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때 두 번에 걸친 엄청난 숙청으로 크게 악화되었고, 북인들의 민심 이반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북인들은 반역을 준비했는데 이괄의 난이 끝난 직후에 [[박홍구]]가 광해군을 태상왕으로 복권시키고, 인성군을 왕으로 옹립하자는 거사를 준비하다가 발각되어서 처형되었다. 이후에도 북인들은 1628년에 임취정과 유효립등이 반역을 꾀하고 1631년에 정한추대사건이 발각나는 등 서인 정권에 반격을 노렸지만 모두 실패했다.이렇게 해서 북인 세력들은 이이첨, 정인홍 박승종, 기자헌, 류희분, 유몽인, 박홍구 임취정을 비롯한 북인 영수들의 이어지는 죽음과 끊임없는 반역 시도로 인해, 세력들을 남김없이 소멸하면서 완전히 멸망했으며, 남이공과 김신국을 비롯한 소북 인사를 중심으로 이후에 [[남인]]에 흡수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